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트린 드 메디시스 (문단 편집) === [[카를 5세]]와 [[클레멘스 7세]] 사이의 전쟁에서 튄 불똥 === 바로 이 신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그녀 인생에서 여러가지로 화근의 씨앗이었다. 그 이전까지 교황과 [[합스부르크 왕조]]간의 유대 관계는 더없이 돈독했으나, [[클레멘스 7세]]는 [[교황]]치고 젊은데다 강단도 아주 강한 교황이었다. 당시 유럽은 [[마르틴 루터]]로부터 촉발된 [[종교개혁]]이 불길처럼 번지는 상황이었건만, 교황의 소프트웨어는 수백년 전 [[십자군 전쟁]] 시기 교황권이 유럽을 호령하던 [[중세]]적 사고에 묶여 있었다. 시대 배경을 간략히 언급하자면, 클레멘스 7세의 이전 교황들은 당대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매우 두터운 관계를 유지했다. 전전대의 [[레오 10세]]는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왕이었던 카를로스 1세가 황제로 선출되게끔 조력을 아끼지 않았고[* 사실 레오 10세는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스페인]] 어느 쪽이든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작센)|프리드리히 3세]]를 밀었다. 카를 5세와 협력한 것은 그가 황제로 선출된 이후였다.], 전대의 [[하드리아노 6세]]는 다름아닌 카를 5세의 가정교사 출신이었다. 더욱이 카를 5세는 종교개혁 속에서 [[가톨릭]]을 수호하기 위해 헌신해왔다. 그런데 이처럼 끈끈한 분위기를 클레멘스 7세는 한큐에 날려버렸다. 클레멘스 7세는 커질대로 커진 황제권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카를 5세의 적인 주변국들과 동맹을 맺고 황제와 적대관계로 돌변했다. 즉 카를 5세의 앙숙인 [[프랑수아 1세]] 및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을 잡은 것이다.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 초기 내내 교황은 프랑수아 1세에 호응하여 카를 5세의 뚜껑을 열게 만들었으며, 가장 결정타는 잉글랜드까지 끌어들여 제국을 사방에서 포위해버린 [[코냑 동맹]]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행위는 [[카를 5세]]의 분노를 유발했고, 결국 1527년에 온 [[로마]]가 [[사코 디 로마|쑥대밭이 되는 대사건]]이 터졌다. 로마가 제국군에 점령당한 반년간 산탄첼로에 피신해 유폐되다시피 한 [[교황]] 클레멘스 7세의 권위는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이처럼 상황이 수습 불가 지경에 이르자 교황은 [[카를 5세]]에게 굴욕적인 [[GG]]를 선언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한편 황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제스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배상금을 메꾸고 [[교황령]]을 재건하며 [[카를 5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스스로 출신지인 피렌체를 공격'''했다. 자기들을 코냑 동맹에 끌어들인 교황 클레멘스 7세 자신이, 그것도 메디치 가문 사람이 적으로 돌변하자 피렌체 사람들은 당연히 경악했고, [[패닉]]에 빠졌다. 물론 피렌체도 제국에 개겨보긴 했지만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이 카를 5세의 수중에 떨어진 판에 피렌체라고 예외일 리가 없었다. 이런 사태를 맞고 분노한 피렌체 시민들에 의해 메디치의 카트린은 거의 죽을 위기에 처했고, 신변의 안전을 위해 [[베네딕토회]] [[수녀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런 불똥이 옮겨붙은 그녀는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오베르뉴를 뺀 땅과 작위를 대부분 잃고 몰락했다. 그 결과 그녀는 태어났을 때에 비해 대외적 가치가 크게 폭락했으나, 그나마 메디치 가문의 재산은 아직 남아 있었기에 아직 클레멘스 7세의 중요한 결혼동맹용 말로 남아있었다. 결국 그녀는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서 계속 줄타기를 하고 있던 클레멘스 7세의 중매로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인 [[앙리 2세|오를레앙 공작 앙리]]와 결혼하게 되었고,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되었다. 이때 카트린과의 결혼에 대해 프랑스에서 큰 반대가 있었는데, 메디치 가문은 당시 벼락출세한 가문으로 여겨져 [[귀천상혼]]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프랑수아 1세는 카트린은 평생 오를레앙 공작부인일 것이며, 프랑스 왕비가 될 일이 없을 것이라고 귀족들을 안심시키며 앙리와 카트린을 결혼시켰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맏아들 프랑수아가 [[파비아 전투]] 때 카를 5세에게 포로로 잡혀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자마자 오래 안 가 죽었으므로, 이 앙리 왕자가 프랑수아 1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그렇기에 [[프랑수아 1세]]가 평생 '오를레앙 공작부인'일 것이라고 장담했던 카트린이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만약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 결혼의 중매만 서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프랑스 [[발루아 왕조|발루아 왕가]]에 여생을 다 바칠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프랑스의 역사도 완전히 뒤집혔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발루아-앙굴렘 왕가가 아닌 [[합스부르크 왕가]]로 시집갔더라면 프랑스가 아니라 [[세계사]] 차원에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결과적으로 [[클레멘스 7세]]는 그녀의 인생과 프랑스의 운명, 나아가 유럽 대륙의 운명까지도 뒤바꿔놓았다. 카트린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카트린은 앙리 2세를 지극히 사랑했으나, 앙리 2세는 카트린과의 관계를 단지 자신의 의무로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앙리 2세는 카트린과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세 연상인 [[디안 드 푸아티에]] 후작부인이라는 애인이 생겼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